문일평 1934년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가 문일평의 내면과
1930년대 시대상을 볼 수 있는 희귀 자료
호암(湖巖) 문일평(1888~1939)은 “신채호가 제기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여러 문제들을 진전시켜, 민중지향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발전”시킨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조선글(훈민정음)의 창제를 조선심(朝鮮心)의 결정(結晶)으로 보는 등 우리 문화적 요소를 중시하였다. 이는 ‘혼’이나 ‘얼’과 같은 정신주의적 면모를 강조한 당대의 여타 사학자들과 괘를 달리하는 그의 특징적 시각이다. 또 민중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역사 관련 글을 남겼다. 또한 대중을 상대로 한 많은 강연을 통하여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문일평은 1933년 평북 정주의 금광왕 방응모(方應謨)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할 때 입사하여 타계할 때까지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문일평의 1934년 일기에 조선일보에서 일한 내용, 조선일보와 관계한 인물들의 다수 등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공부를 잠시 멈추고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은 가계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이 시기부터 문일평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많은 글을 남길 수 있었다.
문일평의 1934년 일기는 한 중국인 골동품상이 갖고 있던 것의 복사물을 저본으로 했다. 원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기에 현재로선 유일한 원본인 이 복사물은,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잘 알려진 문일평의 생활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일기에는 이광수와 홍명희는 물론 김성수, 안재홍, 정인보, 한용운, 백낙준, 이병도 등 당대 언론계와 학계의 최고 지식인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 자료를 통해 문일평이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며 시대를 살아갔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문일평이 평소 관심을 두고 보았던 서적들, 신문에 사설과 연재물을 쓰기 위해 참고한 책들도 상세히 적혀 있어 문일평 연구의 필수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 당시의 언론탄압 분위기와 생활품의 물가 등 시대상과, 매일매일의 날씨도 기록되어 있어 1930년대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도 소중하게 쓰일 것이다.
시대의 증언자 문일평
1934년 4월 17일자 일기를 보면 문일평과 김성수의 만남 이야기가 나온다.
두계(이병도)를 찾아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인촌(仁村) 김성수를 만났다. 인촌이 내 손을 쥐고 탄식하면서 어찌하여 세상일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끝내는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인촌의 뜻은 최린(崔麟) 등을 넌지시 가리켜 말한 것이다. - 67쪽
당시에는 민족지사들이 변절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변절의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세태를 보는 이의 심정이 착잡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최린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제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의)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하였으니, 민족주의 역사학자 문일평의 마음이 “애석”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심각한 언론 탄압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1월 13일자 일기를 보면 「동아일보」 조석간이 단군 기사 때문에 압수당했다는 구절이 나오고, 사설이 사내에서 압수당하는가 하면(3월 18일자), 외국 관련 기사가 정당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압수당하기도 한다(5월 3일).
역사학자 문일평
그는 각종 문헌을 비교해 오류를 바로잡는 역사학자로서의 임무를 잊지 않는다.
<승정원일기>에서 통리기무아문이 고종 18년 신사 정월에 창설되었다는 기사를 뽑아냈다. 그렇다면 <조선사강좌>의 ‘중앙과 지방제도’에서 고종 17년 경진에 설치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동기년>과 최육당의 <조선사>에서 고종 19년 임오라 한 것 또한 잘못이다. 전자는 1년이 앞섰고 후자는 1년이 뒤졌다. - 2월 6일자(35쪽)
문헌고증을 중시한 역사학자답게 그날그날의 날씨를 기록했음은 물론, 당시의 물가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기에 따르면 괘지는 100매에 16전(2월 5일), 책상보 한 장에 1원 80전(3월 2일), 가습기를 설치하고 식대를 포함한 병원 하루 입원비는 1원 45전(3월 16일), 만년필 한 자루는 4원 20전, 잉크 한 병은 28전(4월 6일)이었다.
생활인 문일평
문일평의 생활은 풍족하진 않아 보인다. 2월 26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늘은 봉급일이다. 태반이 공제되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전에 쌀과 땔감 값 빚진 것을 아직도 완전히 갚지 못했다. - 43쪽
급기야 며느리(혜경이 어미)가 금가락지를 팔아 경도(京都)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편(문일평의 아들 동표)에게 학비를 부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2월 27일). 4월 2일에는 문일평이 지인에게 손수 며느리의 취직을 부탁한다. 5월 29일자 일기에서는 “내가 빚지는 것에 단련되어 있음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라 기록하는 등 가난에 대한 깊은 자괴감을 보이고 있다.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맘대로 사지 못하고 남이 책을 사면 자기가 빌려서 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7월 6일).
그럼에도 술은 무척이나 즐긴 모양이다. 일기 곳곳에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하루(3월 10일)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집에 돌아와 모두 토해내고 다음날(3월 11일) 몸져누워 회사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가계에 대한 문일평의 태도가 어느 정도는 이중적인 것이, 5월 30일에 돈 50원 때문에 막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적었는데, 6월 7일에는 구두 한 켤레 값으로 9원을 내고 양복 값을 선불로 10원이나 지불하였다. 이후 일기를 보면 형편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닌 듯한데, 이런 지출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하다.
아비 된 이의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3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경도(京都)에서 유학하는 아들 동표의 성적이 매우 양호(평균 76점)하고 1, 2학년 때보다 나아지는 것에 기쁨을 표하고 있다. 딸이 파혼 당하자 밤잠을 설치고(9월 23일), 파혼의 당사자인 김순호를 불러 훈계한 후 사람됨이 매우 불량하다고 기록(9월 25일)했으며, 남에게 김순호의 흠을 꼬집는(10월 6일) 범상함을 보인 후, 결국 김순호를 불러 야단치고 사과를 받기까지 이른다(10월 16일).
그는 사람됨이 호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기를 보면 시대를 고민하는 꼬장꼬장한 선비의 모습이 그려지나, 자기의 소신을 호쾌하게 밝히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음 일기가 그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을까?
차를 탔는데 정류장 몇 곳을 지나쳤다. 비를 무릅쓰고 내려 돌아왔다. 전차장의 부주의와 불친절이 매우 미운 바가 있다. - 11월 6일자(145쪽)
역자 서문
제1장 1934년 일기
제2장 1934년 사설
부록 1934년 일기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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