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니야.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수학하고는 다르지. 열 명중에 한 명을 기억하는 게 천 명 중에 한 명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르다는 건 어디까지나 수학적인 사고방식일 뿐이지. 각각의 기억이라는 건 숫자처럼 등가적일 수는 없는 법. 그 내용에 따라 기억의 강도랄까 수명이 달라지는 걸 거야.

시간이라는 것도 그래. 오래된 기억이 최근의 기억보다 그 명료성이 떨어 진다는 법은 없지.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많아. 오래된 기억일수록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경험하면서 사니까.
그런저런 말들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의 앞을 하릴없이 오갔다. 그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내가 남아 있을 만큼 그와의 관계에서 내가 각별한 존재였던가. 그랬던가.

왜 나를 대면하기가 뭣한가. 물론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면서도 그런 쪽으로만 생각됐다. 그의 눈빛, 주름, 머리카락, 상기된 듯한 말투…… 그런 것들 때문일 거라고 우선은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를 큰 소리로 부를 뻔했다. 그의 황망한 발걸음과 뒷모습이 그토록 완강해 뵈지만 않았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몇 걸음 그를 따라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저 앞의 붉은 노을이 내게 손을 저어 내 발걸음을 저지했더니 것이다. 검고 작은 그의 몸이 바람처럼 노을 안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저자소개

1957년 경기도 강화 출생.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마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에『노을은 다시 뜨는가』(1990),『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1993),『깡통따개가 없는 마을』(1995),『그녀의 야윈 뺨』(소설선집, 1996),『꿈에 기대어』(짧은 소설, 1997),『도라지꽃 누님』(1999) 등이, 장편소설에『늪을 건너는 법』(1991),『슬픈 바다』(1991),『전장의 겨울』(전2권, 1992),『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1992),『낯선 여름』(1994),『라디오 라디오』(1995),『비밀의 문』(전2권, 1996),『남자의 서쪽』(1997),『내 목련 한 그루』(1997),『오남리 이야기』(연작소설, 1998),『악당 임꺽정』(전2권, 2000),『정별(情別)』(전자책, 2000)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인생은 지나간다』(2000)가 있다. 1994년 단편『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