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요의 거울\n\n\n사람인 내가 신을 생각하면\n아주 크고 온전한 하나의 고요\n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n사람의 말이란 하면 할수록\n자디잘게 깨어지는 거울 조각 같아서\n무엇 하나 온전히 비출 수 없어\n매양 서로 부딪치며 시끄럽기 때문입니다\n그러나 또한 사람의 말은\n어느 결 덧없이 녹고 마는 눈송이 같아\n고요의 거울은 늘 씻은 듯 온전합니다\n신이 어찌 말하겠습니까\n고요가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서\n싹으로 트고 꽃봉오리로 벙글고\n더러는 바람으로 갈꽃을 그려 내지만\n봄 여름 가을 겨울\n천지가 어찌 말하겠습니까\n바로 지금 조용히 바라보세요\n고요의 거울 속\n꽃가지 그림자에\n작은 벌레 한 마리 기어갑니다.\n- 『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n\n\n\n\n그 아득한 꽃과 벌레 사이\n\n\n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n어드메 천 길 낭의 흔들리는 꽃 한 송이\n어두운 들녘 끝 떨기풀의 벌레 한 마리\n이 세상 어딘가\n그 아득한 꽃과 벌레 사이\n강물 하나 끝없이 흐르고 있나니\n그 강물에 이따금 빈 배 접어 띄우고 있나니\n- 『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n\n\n\n\n오래된 물이여 마음이여\n\n\n어느 봄 물오르는 갈매나무 아래서\n나는 문득 깨달았네\n내 마음이 아주 오래된 물이란 것을\n맨 처음 한 방울의 물에서 생명이 움트던\n그 아득한 날부터\n높고 낮은 온 세상을 돌고 돌아\n내게 흘러와 고인 한 줌 물이란 것을\n내 마음도 물비늘을 반짝이며\n갈매나무 푸른 잎사귀와 함께 찰랑거릴 때\n나는 문득 깨달았네\n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산과 바다\n그리고 먼 나라 낯선 땅이 그리운 것은\n아주 오래된 내 마음의 뒤안\n그 깊고 먼 곳이 알고 싶기 때문인 것을\n홀로 걷는 숲길이\n바로 내 안으로 가는 길인 것을\n갈매나무 곁에서 나무가 되어\n나는 문득 깨달았네\n우리들 가슴이 메마르고 갈라진 뒤에\n억새 바람만 사는 마른 강가에서\n떠나간 철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n오래된 물이여 마음이여\n이 세상 곳곳에서 맑게 흘러라\n목이 메어 부르는 내 노래 소리를\n나는 문득 깨달았네\n아직 잎 피고 잎 지는 갈매나무 아래서.\n- 『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

저자소개

국문학자, 시인. 배재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시집에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등 다수. 저서에 『도의 시학』, 『도와 생태적 상상력』 등 다수. 옮긴 책에 『삼국유사』,『구운몽』 등이 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