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그 높고 깊은 - 흰 소가 끄는 수레 4
사랑하는 하나.
동아리 MT 잘 다녀왔겠지. 오늘 돌아온댔으니까 아마 지금쯤 집에 당도해 있겠지. 널 못 보고 떠나와 마음에 걸린다. 요즘 나날이 더욱 깊어지던, 그렇지만 이상한 광채에 싸여 있는 듯한 네 눈빛이 눈앞에 있구나.
비행기는 몽고의 대초원을 지난다.
너도 귀를 뚫겠지. 이제 성숙한 처녀니까. 네가 스무 살이라는 게 꿈 같구나. 3킬로 몸무게로 네가 세상에 나올 때 나는 재직 중이던 여중학교에서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을 강의하고 있었어. 가난하던 시절이었지, 출근할 때마다 오백원씩 네 엄마한테 하루 일당을 받곤 했던. 오백원이면 담배 한 갑, 구내식당 점심값, 그리고 버스비를 제하면 꼭 십원이 남는 돈이었구나.
바이칼이 비에 젖고 있다.
정오까지만 해도 햇빛이 그리 맑더니 정오를 넘기면서 갑자기 사방에서 파죽지세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이윽고 비가 내린다. 정오라면 그의 주검을 건져올린 시각이지. 어쩌면 아침 햇빛 속을 박차고 날아간 그의 영혼이 지금 바이칼을 떠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비젖은 안개구름 망또처럼 두르고, 그, 그 남자, 낡고 요란한 오토바이 높이 올라앉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이곳, 켜켜이 쌓인 적막을 흔들어 깨우려는 듯, 후지르 마을을 돌고 돌던.
사랑하는 하나.
어젠 섬의 북단까지 갔어.
엄마도 참.
너는 웃으면서 대답했어.
여기서 신문지 한 장이면 어딘데 그래.
동아리 MT 떠나보내면서 보았으니 내가 너를 만난 것은 꼭 열아흐레 만이었어. 그 사이 너는 몰라보게 말랐고, 까맣게 탔고, 목이 훌쩍 길어졌고, 눈은 깊었다. 이 신문지 벌써 일주일이나 내 침대보로 쓰고 있는걸. 돈 줄 테니까 파라는 애도 있어, 엄마. 예전과 다름없이 네 웃음은 순하고 맑았다.
- 본문 중에서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소설을 주로 발표, 문제 작가로 주목을 받았으며,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미학적 감동을 전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고, 1996년 계간 「문학동네」에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1981년 장편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신인 부문)을 수상했으며 2001년 김동리 문학상을, 2003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겨울강 하늬바람>, <불꽃놀이>, <우리들 뜨거운 노래>, <불의 나라>, <물의 나라>, <잠들면 타인>, <수요일은 모차르트를 듣는다>, <킬리만자로의 눈꽃> 등이,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 등이, 연작소설 <흉>, <흰 소가 끄는 수레>, 산문집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숙에게 보내는 서른여섯 통의 편지>, <남자들, 쓸쓸하다>,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 등이 있다. 엮은 책으로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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