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어제 내가 본 여자가 네 놈의 안식구라지?'

그 말을 방문 앞에 시립하고 있던 이세화가 통역했다. 안현은 얼굴빛이 변했다. 그리고 마치 벼랑 끝에 서서 나락을 내려다보는 심정으로 이아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려인들은 개새끼야.'

이아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이세화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 말도 통역했다. 이아치는 뜯어먹던 뼈다귀를 접시에 던지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이아치의 부하가 나타나 안현 앞에 한 벌의 비단옷과 머리 장식을 내려놓았다.

'어제 그 여자, 이리 데려와. 네 놈한테는 과분한 여자다. 대신 너에겐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마음대로 여자를 살 수 있는 돈을 주지.'

이아치는 품속에 손을 넣어 말발굽 은(馬蹄銀) 일백량이 든 비단 주머니를 안현에게 던졌다. 안현은 온 몸을 떨다가 튕기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소. 그 여자는 내 아내요. 알겠소? 나무 기러기 들고 붉은 가마 태워 데려온 내 아내란 말이오. 남의 정실을 빼앗아 가겠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요?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건방진 놈!'

통역할 겨를도 없이 이아치가 밥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앞마당으로 칼등이 휜 만도를 찬 이아치의 부하들이 달려왔다.

'이 놈 당장 죽여버려!'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등단하여 문학평론을 써왔으며, 1992년부터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1992), <영원한 제국>(1993), <인간의 길>(1997), <초원의 향기>(1998)가 있다. 또 옮긴 책으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994)이, 엮은 책으로 <이문열 연구>가 있다. 작가세계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중한청년학술상, 추리소설 독자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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